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 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남들과 나눔으로써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고유한 자질은 수백만 년 전 인간이라는 동물이 직립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직립하여 두 발로만 걷게 되면서부터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가지 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의사소통의 능력과 주변환경을 조종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두뇌가 발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구랑은 말했다.[각주:1]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인간은 늘 똑같은 몸, 똑같은 육체적 역량, 변화무쌍한 주변환경과 여건에 대처하는 똑같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기 위하여 발로 걸었고 지금도 걷는다. (pp. 9-11)


<걷기 예찬>의 첫 부분이다.
이 글귀를 읽을 때마다 걸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활동이 전과 다른 굉장한 체험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터벅터벅 두 발을 옮겨 딛으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목적 없이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여태껏 내 삶에서 걷는 행위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었다.
장소 이동 말고 걷기에 다른 소용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걷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만나고 나서 걷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이고 필요한 활동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문을 열고 훌쩍 밖으로 나가는 것,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것, 그러니까 사적 공간을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는 일상의 첫 단계가 조금 덜 귀찮고 조금 더 즐거워졌다.


2015/5/24

  1. Andre Leroi-Gourhan, Les Racines du monde(세계의 뿌리), Paris, Belfond, 1982,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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