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 주의


최근에 영화 <극한직업>과 <기묘한 가족>을 봤다. 웃기는(코믹한) 영화들을 연달아 보다보니 웃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웃음은 의외성에서 오는 것 같다. 

두 영화 다 웃기는 영화인데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극한직업은 캐릭터들이 웃긴다. 캐릭터들이 치는 대사의 의외성.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진지함 따윈 개나 줘버린 가볍고 궁상맞은 멘트들이 관객을 뒤통수 치며 재미를 준다. 서사는 그저 거들 뿐이다. 주요 서사가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하는 과정인데 범인을 잡고 안잡고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서사는 그저 캐릭터들이 활개치게 하기 위해 깔아놓은 매트다. 그래서 서사를 나아가게 만들기 위한 기능적인 장면들은 큰 재미가 없다. 마약상 보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결말을 짓기 위해 형사들이 마약 거래범들을 때려잡는 장면. 특히 마지막에 마약상 보스와 류승룡이 싸우는 장면은 정말 지루했다. 반면 마약반 형사 5인조가 저들끼리 실없는 멘트를 주고받는 장면들은 버릴게 없을 정도로 매 씬이 웃음포인트였다.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와 대사로 승부를 본 영화. 스토리는 사실 형사들이 치킨집(잠복근무)을 하면서 자기가 누군지 정체성을 헷갈리게 된다는 중심사건 말고는 새롭거나 흥미로운 부분 없이 단조롭게 진행된다. 형사와 마약딜러의 대립이라니 얼마나 많이 본듯한 설정인가. 근데 다른 단점을 다 무마할 정도로 캐릭터를 기막히게 잘 뽑았다. 배우들이 능청스럽게 연기하고 제대로 망가져서 캐릭터의 의외성을 잘 살렸다. 씨발씨발을 달고 사는 아저씨같은 이하늬라니. (덧. 억지감동의 요소를 버무리지 않고 쌈빡하게 코미디로만 간 것도 칭찬받아 마땅한 지점이다. 한국영화의 신파 정말 지긋지긋하다.)

기묘한 가족은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서 웃음이 생긴다. 이야기의 의외성. 엉뚱하고 기발하게, 못 들어본 방식으로 스토리가 풀린다. 좀비에게 물렸는데 폭포수같은 오줌발을 획득한다거나, 좀비를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산다거나, 좀비들이 아우성치는 주유소가 파뤼나잇이 된다거나. 그게 웃긴다. 여기에다 장르적 혼성이 주는 재미도 있다. 이건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재미는 아니지만, 하나의 영화가 순간순간 다른 장르의 영화로 변신(?)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묘한 가족 역시 캐릭터가 주는 웃음이 있는데, 가장 웃겼던 캐릭터는 의외로 중견배우 박인환이 연기한 만덕(아버지)이다. 의외라고 말한 이유는 주연 캐릭터들이 전반적으로 다 웃길 것 같았는데, 만덕 빼고 다른 캐릭터들은 기억에 남는 큰웃음을 안 줬기 때문이다. 엄지원이 맡은 남주 역은 외모에서부터 활약을 기대했는데 비중도 작고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였고, 준걸 민걸 캐릭터도 마찬가지로 입체감이 없었다. 특히 사심 섞어서 민걸 역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민걸이 가족을 떠나서 어떻게 살다 온건지, 가족 안에서 관계는 어땠던 건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러니까 캐릭터의 의외성을 만들어낼만한 서사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김남길은 사연 있는 인물을 진짜 잘 살리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민걸 캐릭터는 사연이 없다. 그나마 1초 나왔던 해고 통보 문자 아니었으면 뭐하는 앤지 왜 돌아온 건지 1도 이해 못했을 거다.) 물론 안 중요해서 짤렸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서사의 비중은 의외로 쫑비와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쫑비와 진하게 엮인 만덕과 해걸은 어떤 인물인지 더 드러날 기회가 있었고, 그 인물성을 활용해서 해걸은 청춘영화같은 감성을, 만덕은 웃음을 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다른 캐릭터는 너무 기능적으로 쓰인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2시간의 한정시간 안에 시작과 끝을 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기묘한 가족은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성실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실험했고 상당히 괜찮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감독의 도른자스러움이 폭발하는 진짜 웃긴 장면들이 있다.

두 영화에서 웃음을 만드는 방식을 비교해보고 나니까 단타처럼 치는 멘트로 웃음을 만드는 것보다 서사 자체의 엉뚱함을 가지고 웃음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

극한직업 = 캐릭터가 웃음 캐리. 캐릭터가 너무 잘한, 감정소모 없는 순수 코미디 영화

기묘한 가족 = 스토리가 웃음 캐리. 이야기에 대한 실험정신이 빛나는 장르혼종 코미디 영화

책을 보다가 이런 인용구를 만났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 William James (1842-1910)[각주:1]

이 인용구는 반만 진실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자.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생각을 바꾸면'과 '행동이 바뀌고' 사이에는 쉽게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게 쉬운 일이라면 세상의 다이어터들이 모두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것이다.

생각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의 구분된 사건, 심지어는 거리도 먼 사건을 바로 옆에 붙여 씀으로써 이 문장은 생각의 변화가 손쉽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처럼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둘 사이에도 역시 꽤 큰 간극이 있다.

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도 자전거를 타거나 엑셀을 다루는 일과 마찬가지로 반복된 경험과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가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몸이 만들어진 사람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그는 인격과 운명을 바꿀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맥락은 다르지만 영향 받은 다른 글귀.

(이 문장을 알게 해준 영화 <Waking Life>는 내용이나 표현 면에서나 강렬한 작품이다.)

“There are two kinds of sufferers in this world: those who suffer from a lack of life and those who suffer from an overabundance of life. I’ve always found myself in the second category. When you come to think of it, almost all human behavior and activity is not essentially any different from animal behavior. The most advanced technologies and craftsmanship bring us, at best, up to the super-chimpanzee level.

Actually, the gap between, say, Plato or Nietzsche and the average human is greater than the gap between that chimpanzee and the average human. The realm of the real spirit, the true artist, the saint, the philosopher, is rarely achieved.

Why so few? Why is world history and evolution not stories of progress but rather this endless and futile addition of zeroes. No greater values have developed. Hell, the Greeks 3,000 years ago were just as advanced as we are.

So, what are these barriers that keep people from reaching anywhere near their real potential? The answer to that can be found in another question, and that’s this: Which is the most universal human characteristic? – fear or laziness” 

― Louis MacKey[각주:2]


  1. <생각정리스킬>(복주환,2017) 서문에서 재인용. 원문을 구글링해봤으나 못 찾음. William James라는 사람이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본문으로]
  2. 영화 (Richard Stuart Linklater, 200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상상. 새 별명은 상상으로 정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니까.


유년시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 두 권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와 <앤>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꽤 어렸을 적, 지하실 방 한켠에서 그림도 없고 글씨도 작은 동서문화사 판 <앤>을 정신없이 읽었다. 너무 어렸었기 때문에 처음 1권을 읽는 데에는 1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론 읽는 속도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시리즈의 끝인 12권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고아였지만 앤은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었고, 그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앤을 닮고 싶었다.

<앤>을 다 읽고 나서, 마찬가지로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다. 밍기뉴와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제제. 제제도 가난했다. 하지만 제제에겐 현실에서 떠나 아름답게 날아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없었다. 제제는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는 오히려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오해받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런 제제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 준 뽀르뚜가는 죽는다. 제제는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아름다움도 환상도 없는 어른의 세계로 팽개쳐진다. 그 세계에는 밍기뉴도 들어올 수가 없다. 

처절한 현실.. 가난과 외로움, 빗나가는 마음..  그리고 제제의 아픔. 나는 제제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고 얼마나 아플지를 지금보다 그 때 더 깊이 알았던 것 같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나는 매를 맞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 나는 제제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상상력의 화신인 앤을 동경했지만, 사실 나는 제제와 더 닮았었다. 납처럼 무겁고 아이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민한 아이에겐 더더욱. 현실은 내게서 일찌감치 상상력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앤이 될 수 없었다.

커가면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로웠고, 상상을 잘 하지 못 했다.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데미안의 말처럼, 나는 내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세상보단 내가 누군지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일기를 쓰며 나를 찾아내려고 했다.

대학교에 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다른 관계, 다른 이야기,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이야기, 또 다른 환경을 만났다.

그 사소한 계기들이 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1도, 1도, 또 1도씩 천천히 움직여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벗어났다.

지금은 생각한다.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사람은 화석처럼 가만히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안을 계속 만들어가는 거니까.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바깥으로 뻗어가면서 내가 어떻게 얼마나 뻗어질 수 있는지 상상하고 실험해 보는 걸 말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상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20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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