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 주의


최근에 영화 <극한직업>과 <기묘한 가족>을 봤다. 웃기는(코믹한) 영화들을 연달아 보다보니 웃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웃음은 의외성에서 오는 것 같다. 

두 영화 다 웃기는 영화인데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극한직업은 캐릭터들이 웃긴다. 캐릭터들이 치는 대사의 의외성.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진지함 따윈 개나 줘버린 가볍고 궁상맞은 멘트들이 관객을 뒤통수 치며 재미를 준다. 서사는 그저 거들 뿐이다. 주요 서사가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하는 과정인데 범인을 잡고 안잡고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서사는 그저 캐릭터들이 활개치게 하기 위해 깔아놓은 매트다. 그래서 서사를 나아가게 만들기 위한 기능적인 장면들은 큰 재미가 없다. 마약상 보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결말을 짓기 위해 형사들이 마약 거래범들을 때려잡는 장면. 특히 마지막에 마약상 보스와 류승룡이 싸우는 장면은 정말 지루했다. 반면 마약반 형사 5인조가 저들끼리 실없는 멘트를 주고받는 장면들은 버릴게 없을 정도로 매 씬이 웃음포인트였다.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와 대사로 승부를 본 영화. 스토리는 사실 형사들이 치킨집(잠복근무)을 하면서 자기가 누군지 정체성을 헷갈리게 된다는 중심사건 말고는 새롭거나 흥미로운 부분 없이 단조롭게 진행된다. 형사와 마약딜러의 대립이라니 얼마나 많이 본듯한 설정인가. 근데 다른 단점을 다 무마할 정도로 캐릭터를 기막히게 잘 뽑았다. 배우들이 능청스럽게 연기하고 제대로 망가져서 캐릭터의 의외성을 잘 살렸다. 씨발씨발을 달고 사는 아저씨같은 이하늬라니. (덧. 억지감동의 요소를 버무리지 않고 쌈빡하게 코미디로만 간 것도 칭찬받아 마땅한 지점이다. 한국영화의 신파 정말 지긋지긋하다.)

기묘한 가족은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서 웃음이 생긴다. 이야기의 의외성. 엉뚱하고 기발하게, 못 들어본 방식으로 스토리가 풀린다. 좀비에게 물렸는데 폭포수같은 오줌발을 획득한다거나, 좀비를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산다거나, 좀비들이 아우성치는 주유소가 파뤼나잇이 된다거나. 그게 웃긴다. 여기에다 장르적 혼성이 주는 재미도 있다. 이건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재미는 아니지만, 하나의 영화가 순간순간 다른 장르의 영화로 변신(?)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묘한 가족 역시 캐릭터가 주는 웃음이 있는데, 가장 웃겼던 캐릭터는 의외로 중견배우 박인환이 연기한 만덕(아버지)이다. 의외라고 말한 이유는 주연 캐릭터들이 전반적으로 다 웃길 것 같았는데, 만덕 빼고 다른 캐릭터들은 기억에 남는 큰웃음을 안 줬기 때문이다. 엄지원이 맡은 남주 역은 외모에서부터 활약을 기대했는데 비중도 작고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였고, 준걸 민걸 캐릭터도 마찬가지로 입체감이 없었다. 특히 사심 섞어서 민걸 역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민걸이 가족을 떠나서 어떻게 살다 온건지, 가족 안에서 관계는 어땠던 건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러니까 캐릭터의 의외성을 만들어낼만한 서사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김남길은 사연 있는 인물을 진짜 잘 살리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민걸 캐릭터는 사연이 없다. 그나마 1초 나왔던 해고 통보 문자 아니었으면 뭐하는 앤지 왜 돌아온 건지 1도 이해 못했을 거다.) 물론 안 중요해서 짤렸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서사의 비중은 의외로 쫑비와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쫑비와 진하게 엮인 만덕과 해걸은 어떤 인물인지 더 드러날 기회가 있었고, 그 인물성을 활용해서 해걸은 청춘영화같은 감성을, 만덕은 웃음을 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다른 캐릭터는 너무 기능적으로 쓰인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2시간의 한정시간 안에 시작과 끝을 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기묘한 가족은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성실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실험했고 상당히 괜찮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감독의 도른자스러움이 폭발하는 진짜 웃긴 장면들이 있다.

두 영화에서 웃음을 만드는 방식을 비교해보고 나니까 단타처럼 치는 멘트로 웃음을 만드는 것보다 서사 자체의 엉뚱함을 가지고 웃음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

극한직업 = 캐릭터가 웃음 캐리. 캐릭터가 너무 잘한, 감정소모 없는 순수 코미디 영화

기묘한 가족 = 스토리가 웃음 캐리. 이야기에 대한 실험정신이 빛나는 장르혼종 코미디 영화

<깨달음의 혁명>(이반 일리치, 사월의책) 

제 2장 폭력, 미국을 비추는 거울

<외국에서 온 착한 착취자>

빈곤과의 전쟁은 사회사업가가 수행하는 전쟁이고, 진보를 위한 동맹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3분의 2에서 군사정권을 유지하거나 그들에게 권력을 넘기려고 결성한 동맹이다. 둘 다 선의의 이름으로 시작했고, 현재는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들로 보이지만, 사실은 폭력을 잉태한 것들이다. (30)

미국 자국내 - '빈곤과의 전쟁' / 미국->라틴아메리카 '진보를 위한 동맹' / 미국->베트남. 베트남 전쟁(남베트남 체제 보호)

<모두가 부자가 되는 꿈>

빈곤고의 전쟁은 미국의 이른바 '혜택 받지 못한 비주류'를 미국식 생활방식의 주류로 통합하는 것이 목표다. 진보를 위한 동맹은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저개발' 국가를 산업국가 대열로 통합하는 데 목표가 있었다. 두 정책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시키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정책 모두 실패했다. (30)

현재 이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미국식 생활방식으로 이득을 챙겨온 소수 개종자들이 중산층으로 가기 위해 확보한, 취약한 교두보를 지키는 데 쓰인다는 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31)

<돈, 총, 교사>

세 전장에서 구사하는 전략은 똑같다. 돈과 군대, 교사가 그 전략이다. 하지만 미국의 돈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은 미국 빈민가에서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렇게 수입된 특혜가 결과적으로 소수에게 집중되면 소수는 다수에 대항해 자신들을 더욱 단단하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대다수 빈곤층에게 그들을 둘러싼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좌절감이 심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풍요의 세 전선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총이 더욱 중요해진다. (34)

<무기를 버리고 돌멩이를 들어라>

수십억 인류를 메스껍게 만드는 것은 겨우 수백만 명이 영위하는 미국식 생활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국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사이비종교 같은 그들 신조의 우월성을 사회적 약자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지치지 않고 강요할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발생적인 폭력은 우상에 복종하라는 강요가 가해질 때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개인이나 민중이 거부할 공산이 큰 우상을 계속 받들라고 요구한다면, 이제 그 폭력이 조직화된 폭력으로 확산되는 것도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38)

미국의 관찰자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연구한다면,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잠깐 흔들릴지는 몰라도 여전히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눈에 깃든 환상은 보기 쉬워도 자기 안에 숨은 망상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마음에 간직된 우애를 어떻게 바꿨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미국 사람의 마음에 있는 우애를 통찰하는 데도 유익하다. (39-40)


제 3장 외국인 아닌 외국인

<이민자 대하기>

만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당신을 외국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신이 속한 집단의 고유한 특성을 알려는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일 것이다. (45)

반대로 "우리는 다 미국인이에요"라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 그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될 권리, 전통을 가질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도 있는 그 권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45)


제 4장 침묵의 문법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의미가 발신되는 방식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이 학문은 말보다는 침묵을 통해서, 혹은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단어와 문장은 소리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리와 말들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침묵의 순간들은 원자 속의 전자들처럼, 태양계 안의 행성들처럼 광활한 진공 속에서 빛을 내는 점입니다. 언어란 고대 페루의 결승문자가 매듭 사이의 간격을 통해 의미를 전달했듯이 침묵의 줄에 소리를 매듭지어 놓은 끈입니다. 공자도 언어가 바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퀴살이 모여 수레바퀴를 만들지만, 실은 그 사이의 빈 공간이 바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63)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의 말뿐 아니라 그의 침묵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소리를 통해서만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말을 멈추는 순간에도 의미가 전달됩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소리보다 침묵을 배우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64)


제 5장 부도덕한 자선

<외국에서 온 신부님>

현재 라틴아메리카 교회 인력의 상당수는 중산층과 상류층들을 위해 봉사하는 민간 기관에서 일한다. 이 기관들은 종종 높은 수익을 올리곤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할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절실한 대륙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직자들 역시 대부분이 대단치 않은 성사, 준성사, 미신적인 축복이나 베푸는 등의 기능적 업무를 수행하는 데 얽매어있다. 대부분이 비루하게 살아가는 셈이다. (90)


제 8장 학교교육은 필요한가? 

<오늘날 학교교육이 의미하는 것>

학교교육은 또한 그 자체 학교로 변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관례적 보증을 하는 절차를 가리킨다. 학교는 이미 성공이 보장된 사람을 선발하고는 그들에게 사회에 적합한 사람임을 표시하는 배지를 달아주고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한다.
학교교육이 사회의 일원임을 확인해주는 품질보증 과정이 되고나면, 이제 그 사람이 얼마나 사회에 적합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젊은 시절에 공식 교육에 들인 시간과 돈이다. (163)

<인간 피라미드>

학교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사람의 급은 낮아진다. ... 사회적 서열도 학교교육을 받은 수준에 따라 정한다. (169)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에서 정부가 학교에 돈을 많이 쓴다는 말은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에게 더 많은 특권을 준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엘리트들을 후원하고는 그것을 정치적 이상이라 말하면서 법률로 명시한다. 이 법률은 명백히 불가능한 목표, 곧 모두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주겠다는 목표를 공언한다. (169-170)

매년 학교를 졸업해서 만족을 얻는 고객보다는 형편 때문에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어 좌절에 빠진 사람들 숫자가 훨씬 많다. 이렇게 실패한 이들은 최저 노동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실패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가파른 교육의 피라미드는, 각자의 사회적 신분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시민들은 피라미드에 있는 자기 자리로 학교화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교적 소수의 성공한 이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차별 양식이 정치적 용인을 받는다. (170)

라틴아메리카 사람에게 있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다는 것은, 물려받은 대로 신분이 정해지던 세상에서 학교교육을 얼마나 받았는가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세상으로 이동한다는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학교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리하게 출발한 사람을 마치 노력으로 성취한 사람처럼 합리화한다. 특권 위에 평등과 공평한 기회라는 허울을 입히는 것이다. (170)

<학교교육의 대안>

이런 실업학교 대신에 산업단지에 보조금을 주어 용도를 변경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근무시간 이후엔 공장을 훈련기관으로 쓰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경영자는 시간을 내어 이 훈련을 계획하고 감독하게 하고, 생산 공정은 교육적 가치가 있도록 새로 짜는 것이다. 이처럼 학교에 들어가는 비용 일부를 떼어 기존의 자원을 교육적으로 이용하도록 쓰면,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비할 데 없이 큰 성과를 낼 것이다. (173)

지금은 중세 때처럼 수도원이나 회당, 학교 같은 신성구역에 갇혀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야 '세속세계'로 나가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173)


제 9장 학교, 그 신성한 소

학교는 세속시대의 국교입니다. 현대의 학교는 2세기 전 모든 사람을 산업국가로 편입시키려고 출발한 보편교육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나라들은 학교를 국민통합 기관으로 활용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지배계급에 제국주의적 권력의 가치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대중에게는 학교교육을 받은 엘리트보다 열등하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학교교육의 세례를 빼놓고는 어떤 국가도 산업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학교중퇴자는 마치 11세기 스페인에서 신앙을 버린 개종자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187-8)

저는 이 세기가 끝날 쯤에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학교'가 철도 및 자가용과 함께 발전했다가 폐기된 역사적 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의료 분야에서 주술적 치료행위가 공중보건이 확대되면서 밀려난 것처럼, 교육에서 학교도 주변부로 밀려날 거라 확신합니다. (189)


제 11장 가난을 부르는 경제개발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수요 만들기>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구현한 것이 제도지만, 지금 우리는 거꾸로 그것의 포로가 되었다. 공장, 언론, 병원, 정부, 학교가 생산하는 패키지 상품과 서비스는 우리의 세계관을 가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런 제도들을 늘리는 것을 진보라고 말한다. (236)

채 백 년도 되지 않아 산업사회는 인간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독점적 해결책들을 만들어냈다. (236)

소비자는 상품에 금방 싫증을 내게끔 훈련을 받는다. 이 말은 똑같은 상품 꾸러미를 품질과 포장만 살짝 바꿔 공급하는 생산자에게 소비자가 지속적 충성을 바치게 한다는 뜻이다. (236-7)

<저개발의 심리>

지금 세계는 두 개의 과정이 하나로 엉키는 교착지점에 들어서고 있다.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는데, 필요를 충족시킬 기본적 선택 대상은 오히려 줄고 있는 것이다. ... 게다가 사회적 상상력이 갈수록 위축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 이 소비숭배 사회에서 판매중인 상품 말고는 달리 수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241-2)

저개발의 구체적 결과는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저개발은 무엇보다 심리 상태이다. ... 심리 상태로서의 저개발은 대중의 필요가 상품에 대한 수요로 바뀔 때 발생한다. 즉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인 상품 패키지만이 필요의 해결책이 될 때, 저개발의 심리가 생겨난다. 이런 의미의 저개발은 교실, 식량, 자동차, 병원의 공급이 다 같이 늘고 있는 나라일 수록 더 급속도로 번져간다. 그곳에서 지배 계층은 애초부터 부유층에 맞게 설계한 서비스들만을 구축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수요를 독점해버리면, 나머지 대다수가 필요를 충족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242-3)

의식의 형태인 저개발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른바 '물화'가 극단으로 나타난 경우라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물화란 필요를 느끼는 인간의 실제 감각이 대량생산된 상품에 대한 수요로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말한다. 가령 갈증이라는 감각이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로 바뀌는 것이 그러하다. 물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거대 관료조직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비자가 될 사람들의 상상력을 가둠으로써 그렇게 한다. (243)

지금 발생하는 저개발은 교육의 원래 역할과는 정반대 일을 한다. 교육이란 인간 잠재력의 새로운 차원을 일깨우고 삶을 가꾸는 일에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쓰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나 저개발은 미리 패키지화한 해결책에 사회 전체의 의식을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244)

<상표를 가린 상품들>

한 사회의 의식이 점점 학교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감각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대다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사꾼이 선대로부터 어쩔 수 없이 물려받았던 열등감은 학교 낙오자의 열등감으로 바뀌었다. 실패의 책임이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열등감이다. 이처럼 학교는 과거의 교회보다 훨씬 철저하게 사회적 신분에 신성한 기원이 있는 것처럼 합리화한다. (246)

<근본적 대안을 찾는 연구>

현재 각 분야를 선점한 생산물과 제도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대안은 우연히 떠오르는 발상과 달리 훨씬 강도 높게 의지와 지성을 집중할 때 비로소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본질은 제쳐 놓고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의지와 지성을 집중하는 연구에 익숙해졌다. (252)

베트남 사람들은 자전거와 뾰족하게 깎은 죽창만으로 최첨단 무기와 지금껏 개발된 제품들을 멈추게 했다. 우리는 제3세계에서 인간의 독창성만으로도 기계의 위력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저개발의 심화라는 이 비참한 흐름을 뒤집을 유일한 방안은, 기존의 해결책들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마음을 버리고 그것들을 비웃는 것이다. 오직 자유인만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지라도, 자유를 남보다 더 누리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256)


제 12장 새로운 혁명의 원리

<발전인가, 양극화인가>

개발의 목표는 시대나 지역에 상관없이 북대서양 국가에 표준적인 소비자 가치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언제나 소수에게 더 많은 특권을 준다는 뜻이 들어있다. (261)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는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진다는 사실이다. (262)

부자나라의 최저 소비 수준이 아무리 내려가고 가난한 나라 도시민의 최고 소비 수준이 아무리 올라가도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는 줄지 않을 것이며, 한 나라 안에서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도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가난은 세계 시장을 산업국가의 중산층 이념에 억지로 맞추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 가난은 한 나라만이 아닌 다국적 공동체 안에 구축된 것이다. 표준화된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하라는 선전활동으로 수요가 조작된 곳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장에서는 사람들의 기대 수준도 똑같이 표준화 되어 있으며, 늘 팔 수 있는 자원을 초과해 형성되어 있다. (263)

<학교라는 이름의 도박>

능력주의란 학교에서 시민 각자에게 정해준 자리가 마땅히 그럴 만하다고 믿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268)

학교교육은 개인에게는 그저 '행운의 바퀴' 같은 게임이지만, 나라 차원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저개발의 바퀴를 돌리는 일이다. 최소 몇 년의 학교교육은 받아야 배운 사람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을 가난한 나라가 가지면, 고비용을 요구하는 학교교육 때문에 교육 전체가 희소자원으로 바뀐다. (269)

<학교 신화에서 벗어나기>

학교에 대한 또 다른 환상은 우리의 배움(learning) 대부분이 교육(teaching)에서 주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교육도 특정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하지만 사람의 생애 대부분을 가두는 장소로 학교를 활용하는 몇몇 부자나라를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학교 바깥에서 통찰이며 지식이며 기술 등을 습득한다. (275-6)

문화 혁명가들이 해야 할 일은 어떤 의무적 교과과정의 강제도 거부할 수 있는 법적 보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 국가는 교육의 제도화를 규정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의무교육 폐지) (276)

둘째로, 이런 탈제도화 방안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고용과 선거의 차별을 금하는 법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교과과정을 이수해야만 배움의 전당에 입학 허가를 내주는 따위의 차별 행위를 금하는 법률이 필요하다. (고비용이 드는 학업을 마친 사람을 우대하는 고용상의 차별 없애기) (276)

세 번째의 법적 개혁은 시민 각자가 공공의 교육자원을 동등하게 가질 권리, 자신의 몫을 확인받을 권리, 그것을 거절당하면 고소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교육 신용제도) (276-7)

내가 지금까지 교육을 예로 들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문화 혁명이나 제도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는 발전은 정 반대다. 주어진 환경을 관리하고 조작하여 인간을 그 환경에 맞는 도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화 혁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을 재검토하고 이 현실에 맞는 용어로 세계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이와 달리 발전은 환경을 억지로 만들려는 시도이며, 엄청난 비용을 들여 그 환경을 구매하라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277-8)

의무교육에 숨겨진 사회와 인간 정신에 대한 파괴적 성격은, 모든 제도들에 숨어있는 파괴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제도들은 오늘날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물품, 서비스, 복지제도의 종류들을 지시하고 감독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길은 문화 혁명과 제도 혁명밖에 없다. 소수가 자기들 이익을 위해 억지로 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일으키는 폭력은, 오직 이런 혁명으로만 막을 수 있다. (278-9)

Drama, 극이라는 것의 핵심은 갈등이고, 갈등은 딜레마의 형태로 표현되곤 한다.

통속극 드라마에서 인물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아닌지, 또는,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밝힐 것인지 밝히지 않을 것인지 딜레마에 놓이곤 한다. (밝히지 않으면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고 밝히면 기존의 질서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충격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극에서 딜레마가 무엇인지, 인물들이 무엇으로 인해 고뇌하고 갈등하는지,
인물을 고민에 빠뜨리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신경써서 살펴보면
인물의 내면과 그가 사는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삶도 다른 이의 시선에서 보면 한 편의 극에 불과하겠지.

그렇다면 극에 대해 배운 것을 적용해 보자.

지금까지 28년 동안 나라는 인물의 삶에서 딜레마는 무엇이었나?

사회가 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하며
사회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방식대로 살 것인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실패자, 루저이고,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언제 어디서나 주어진다.)

아니면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하며
나다운 삶,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은 안전하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조차도 어떤 길인지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깜깜하고 불안한 길이다.)

하는 딜레마다.


이렇게 써보니 참으로 단순하구나.

책을 보다가 이런 인용구를 만났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 William James (1842-1910)[각주:1]

이 인용구는 반만 진실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자.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생각을 바꾸면'과 '행동이 바뀌고' 사이에는 쉽게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게 쉬운 일이라면 세상의 다이어터들이 모두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것이다.

생각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의 구분된 사건, 심지어는 거리도 먼 사건을 바로 옆에 붙여 씀으로써 이 문장은 생각의 변화가 손쉽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처럼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둘 사이에도 역시 꽤 큰 간극이 있다.

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도 자전거를 타거나 엑셀을 다루는 일과 마찬가지로 반복된 경험과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가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몸이 만들어진 사람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그는 인격과 운명을 바꿀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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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은 다르지만 영향 받은 다른 글귀.

(이 문장을 알게 해준 영화 <Waking Life>는 내용이나 표현 면에서나 강렬한 작품이다.)

“There are two kinds of sufferers in this world: those who suffer from a lack of life and those who suffer from an overabundance of life. I’ve always found myself in the second category. When you come to think of it, almost all human behavior and activity is not essentially any different from animal behavior. The most advanced technologies and craftsmanship bring us, at best, up to the super-chimpanzee level.

Actually, the gap between, say, Plato or Nietzsche and the average human is greater than the gap between that chimpanzee and the average human. The realm of the real spirit, the true artist, the saint, the philosopher, is rarely achieved.

Why so few? Why is world history and evolution not stories of progress but rather this endless and futile addition of zeroes. No greater values have developed. Hell, the Greeks 3,000 years ago were just as advanced as we are.

So, what are these barriers that keep people from reaching anywhere near their real potential? The answer to that can be found in another question, and that’s this: Which is the most universal human characteristic? – fear or laziness” 

― Louis MacKey[각주:2]


  1. <생각정리스킬>(복주환,2017) 서문에서 재인용. 원문을 구글링해봤으나 못 찾음. William James라는 사람이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본문으로]
  2. 영화 (Richard Stuart Linklater, 200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Topic: New

Q. What kind of new things you like?

I like new clothes that fit my recent figure perfectly, and make me look better.

I also like new books. I mean, books that are new to me. When I found something new and cool in them, the books are "new" to me no matter how old they really are. And I would love them.


Q. What do you think of when you hear the word "new"?

When I hear the word 'new', I would think of shiny new stuff before.

But recently I changed my mind.

Several months ago, I moved into a new house. After that, I have to adapt myself to the new room, new town, new stuffs that I bought day by day.

And it took me a great time and energy.

For a while, I was completely tired of all the new things that I have to get used to.

Therefore, the word 'new' brings me both good and bad aspects of new things.

Aaron Lampert 작품 (뮤직비디오)

‘GO GREEN’ - Prolyphic & Buddy Peace


Thomas Hicks <Look at the monkey>의 음악 작곡가로 표기되어 있어서 찾아본 Aaron Lampert.

뮤지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같은 애니메이터였다.

이 작품은 귀여워서 보관.


20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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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icks 작품 (Motion image)  (0) 2016.11.06

Thomas Hicks - Look at the monkey


오랜만에 즐거운 충격을 준 작품.

짧아서 더 감질나고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제각각 의미 모를 동작들을 하고 있다. 공중제비를 도는 움직임, 꼭두각시 줄에 묶인 채 걸어가는 움직임, 무거운 굴레를 밀어버리려 안간힘 쓰는 움직임, 균형 잡는 광대의 움직임, 순간이나마 새처럼 날듯이 자전거를 달리는 움직임.. 모두 서커스 동작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었지만 제각각 즐거움과 힘겨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 같다.


어떤 서사도 필요없이, 이미지의 움직임 자체가 작품의 전부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왜 '움직이는 이미지(Motion Image)'라는 장르로 표현되었는지가 필연적이다. 움직여야 되니까 움직임을 넣은 것이라거나(장르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작품을 만든 것) 서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움직임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주인공이다. 바꿔 말하면 이 작품은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르의 정의같은 작품이다. 


Look at the monkey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다른 작품들
  • Kaiten Mokuba
    여전히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그 움직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하는 한숨과 머뭇거림의 감정을 전달한다.


아래는 뮤직비디오 작업들.

- <런던 일러스트 수업>(munge&sunni, 아트북스)에서 보고 찾아본 아티스트

- Thomas Hicks의 공식 사이트 (http://thomashicks.co.uk)


20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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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ron Lampert  (0) 2016.11.06

상상. 새 별명은 상상으로 정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니까.


유년시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 두 권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와 <앤>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꽤 어렸을 적, 지하실 방 한켠에서 그림도 없고 글씨도 작은 동서문화사 판 <앤>을 정신없이 읽었다. 너무 어렸었기 때문에 처음 1권을 읽는 데에는 1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론 읽는 속도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시리즈의 끝인 12권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고아였지만 앤은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었고, 그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앤을 닮고 싶었다.

<앤>을 다 읽고 나서, 마찬가지로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다. 밍기뉴와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제제. 제제도 가난했다. 하지만 제제에겐 현실에서 떠나 아름답게 날아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없었다. 제제는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는 오히려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오해받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런 제제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 준 뽀르뚜가는 죽는다. 제제는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아름다움도 환상도 없는 어른의 세계로 팽개쳐진다. 그 세계에는 밍기뉴도 들어올 수가 없다. 

처절한 현실.. 가난과 외로움, 빗나가는 마음..  그리고 제제의 아픔. 나는 제제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고 얼마나 아플지를 지금보다 그 때 더 깊이 알았던 것 같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나는 매를 맞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 나는 제제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상상력의 화신인 앤을 동경했지만, 사실 나는 제제와 더 닮았었다. 납처럼 무겁고 아이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민한 아이에겐 더더욱. 현실은 내게서 일찌감치 상상력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앤이 될 수 없었다.

커가면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로웠고, 상상을 잘 하지 못 했다.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데미안의 말처럼, 나는 내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세상보단 내가 누군지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일기를 쓰며 나를 찾아내려고 했다.

대학교에 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다른 관계, 다른 이야기,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이야기, 또 다른 환경을 만났다.

그 사소한 계기들이 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1도, 1도, 또 1도씩 천천히 움직여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벗어났다.

지금은 생각한다.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사람은 화석처럼 가만히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안을 계속 만들어가는 거니까.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바깥으로 뻗어가면서 내가 어떻게 얼마나 뻗어질 수 있는지 상상하고 실험해 보는 걸 말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상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2015.6.4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 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남들과 나눔으로써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고유한 자질은 수백만 년 전 인간이라는 동물이 직립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직립하여 두 발로만 걷게 되면서부터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가지 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의사소통의 능력과 주변환경을 조종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두뇌가 발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구랑은 말했다.[각주:1]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인간은 늘 똑같은 몸, 똑같은 육체적 역량, 변화무쌍한 주변환경과 여건에 대처하는 똑같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기 위하여 발로 걸었고 지금도 걷는다. (pp. 9-11)


<걷기 예찬>의 첫 부분이다.
이 글귀를 읽을 때마다 걸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활동이 전과 다른 굉장한 체험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터벅터벅 두 발을 옮겨 딛으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목적 없이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여태껏 내 삶에서 걷는 행위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었다.
장소 이동 말고 걷기에 다른 소용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걷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만나고 나서 걷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이고 필요한 활동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문을 열고 훌쩍 밖으로 나가는 것,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것, 그러니까 사적 공간을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는 일상의 첫 단계가 조금 덜 귀찮고 조금 더 즐거워졌다.


2015/5/24

  1. Andre Leroi-Gourhan, Les Racines du monde(세계의 뿌리), Paris, Belfond, 1982,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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