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Hicks - Look at the monkey


오랜만에 즐거운 충격을 준 작품.

짧아서 더 감질나고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제각각 의미 모를 동작들을 하고 있다. 공중제비를 도는 움직임, 꼭두각시 줄에 묶인 채 걸어가는 움직임, 무거운 굴레를 밀어버리려 안간힘 쓰는 움직임, 균형 잡는 광대의 움직임, 순간이나마 새처럼 날듯이 자전거를 달리는 움직임.. 모두 서커스 동작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었지만 제각각 즐거움과 힘겨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 같다.


어떤 서사도 필요없이, 이미지의 움직임 자체가 작품의 전부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왜 '움직이는 이미지(Motion Image)'라는 장르로 표현되었는지가 필연적이다. 움직여야 되니까 움직임을 넣은 것이라거나(장르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작품을 만든 것) 서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움직임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주인공이다. 바꿔 말하면 이 작품은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르의 정의같은 작품이다. 


Look at the monkey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다른 작품들
  • Kaiten Mokuba
    여전히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그 움직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하는 한숨과 머뭇거림의 감정을 전달한다.


아래는 뮤직비디오 작업들.

- <런던 일러스트 수업>(munge&sunni, 아트북스)에서 보고 찾아본 아티스트

- Thomas Hicks의 공식 사이트 (http://thomashicks.co.uk)


20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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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ron Lampert  (0) 2016.11.06

상상. 새 별명은 상상으로 정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니까.


유년시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 두 권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와 <앤>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꽤 어렸을 적, 지하실 방 한켠에서 그림도 없고 글씨도 작은 동서문화사 판 <앤>을 정신없이 읽었다. 너무 어렸었기 때문에 처음 1권을 읽는 데에는 1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론 읽는 속도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시리즈의 끝인 12권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고아였지만 앤은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었고, 그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앤을 닮고 싶었다.

<앤>을 다 읽고 나서, 마찬가지로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다. 밍기뉴와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제제. 제제도 가난했다. 하지만 제제에겐 현실에서 떠나 아름답게 날아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없었다. 제제는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는 오히려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오해받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런 제제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 준 뽀르뚜가는 죽는다. 제제는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아름다움도 환상도 없는 어른의 세계로 팽개쳐진다. 그 세계에는 밍기뉴도 들어올 수가 없다. 

처절한 현실.. 가난과 외로움, 빗나가는 마음..  그리고 제제의 아픔. 나는 제제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고 얼마나 아플지를 지금보다 그 때 더 깊이 알았던 것 같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나는 매를 맞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 나는 제제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상상력의 화신인 앤을 동경했지만, 사실 나는 제제와 더 닮았었다. 납처럼 무겁고 아이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민한 아이에겐 더더욱. 현실은 내게서 일찌감치 상상력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앤이 될 수 없었다.

커가면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로웠고, 상상을 잘 하지 못 했다.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데미안의 말처럼, 나는 내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세상보단 내가 누군지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일기를 쓰며 나를 찾아내려고 했다.

대학교에 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다른 관계, 다른 이야기,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이야기, 또 다른 환경을 만났다.

그 사소한 계기들이 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1도, 1도, 또 1도씩 천천히 움직여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벗어났다.

지금은 생각한다.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사람은 화석처럼 가만히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안을 계속 만들어가는 거니까.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바깥으로 뻗어가면서 내가 어떻게 얼마나 뻗어질 수 있는지 상상하고 실험해 보는 걸 말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상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2015.6.4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 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남들과 나눔으로써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고유한 자질은 수백만 년 전 인간이라는 동물이 직립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직립하여 두 발로만 걷게 되면서부터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가지 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의사소통의 능력과 주변환경을 조종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두뇌가 발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구랑은 말했다.[각주:1]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인간은 늘 똑같은 몸, 똑같은 육체적 역량, 변화무쌍한 주변환경과 여건에 대처하는 똑같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기 위하여 발로 걸었고 지금도 걷는다. (pp. 9-11)


<걷기 예찬>의 첫 부분이다.
이 글귀를 읽을 때마다 걸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활동이 전과 다른 굉장한 체험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터벅터벅 두 발을 옮겨 딛으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목적 없이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여태껏 내 삶에서 걷는 행위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었다.
장소 이동 말고 걷기에 다른 소용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걷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만나고 나서 걷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이고 필요한 활동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문을 열고 훌쩍 밖으로 나가는 것,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것, 그러니까 사적 공간을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는 일상의 첫 단계가 조금 덜 귀찮고 조금 더 즐거워졌다.


2015/5/24

  1. Andre Leroi-Gourhan, Les Racines du monde(세계의 뿌리), Paris, Belfond, 1982,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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